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잉카 제국 (문단 편집) == 사회문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ncasociety.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eschichte-des-Kostüms-(1905)-(14761457936)_main_1481112783317.jpg|height=300]]}}} || 잉카는 시민들을 '''미타'''(mit'a)라는 노동력 단위의 [[세금]]으로 관리했다. 잉카의 시민은 1년에 108일 동안 국가에 자신의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이 시기에는 부역에 나가 [[도로]]를 닦고, [[요새]]를 건설하며, [[신전]]을 건설하는 등 노동을 해야했다. 또한, [[노동]]을 하는 날짜를 가족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었는데, 가족이 4명일 경우 1인당 27일을 일하고, 가족이 12명이면 1인당 9일을 일했으며, 가족이 54명이면 1인당 이틀을 일했다(15~60세의 남자에게만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잉카의 가족은 대부분 [[대가족]]이었다. 잉카 정부는 주민을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관리했다. 10개의 '''푸릭'''(가구)을 '''충카'''라고 불렀으며, 충카의 관리자를 '''충카 카마욕'''이라고 했다. 그리고 충카 카마욕, '''파차카 쿠라카'''(100명), '''와랑가 쿠라카'''(1,000명), '''우누 쿠라카'''(10,000명)가 각각 10개의 하위 '쿠라카'를 관리했다. 이것이 잘 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보는 자'라는 뜻의 '''토코이리콕'''이었으며, 우누 쿠라카와 토코이리콕의 상관이 전국 88개 지방 수도를 담당하는 '''토크리콕'''이었다. 그리고 토크리콕의 위에는 '''아푸'''라고 하는 4개의 '''수유'''(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를 관리하는, '''사파 잉카'''(황제)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최고 귀족이 존재했다. 잉카의 정복 전쟁은 격렬하고 매우 잔인했으나, 일단 정복한 뒤에는 그 지방의 풍습을 인정하고 그곳의 우두머리를 쿠라카(curaca)라는 관리로 인정하여 고향을 다스리도록 했다. 가장 작은 행정 단위로 '''아이유'''라는 집성촌 비슷한 것을 만들고, 한 사람이 10명씩을 책임지고 이런 책임자 몇몇을 또 다른 한 사람이 책임지고 하는 식으로 사회를 구성했다.[* 사람을 10명으로 묶었다는 점에서는 [[진나라]]의 [[십오제]]와 유사하다.] 아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 집성촌 같은 것으로 잉카가 정해준 땅을 마을에서 함께 관리했다. 즉 마을 땅, 종교행사에 쓸 물건을 얻으려고 쓰는 땅, 잉카의 땅으로 나뉘었다. [[전쟁]]에 징병되는 것도 세금의 하나였다. 잉카는 백성들이 놀고 먹는 것을 싫어하여 엄청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해마다 [[벼룩]]을 잡아서 바치게 했다.[* 이상해보이겠지만,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벼룩이 많이 꼬이는 건 당연하고 벼룩이 많이 꼬이면 전염병이 퍼지기 쉬운 만큼 벼룩을 잡게 함으로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늙었거나(50세 이상이 기준) 병든 사람, [[과부]]와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마을에서 무조건 도와주도록 되어 있었다. 어쩌다 [[가뭄]]이라도 나면 마을 창고를 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잉카의 [[창고]]를 열어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또한 제국 차원에서의 의료제도도 상당한 수준으로 정비되어서 평민도 [[질병]]이 들면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의료 혜택을 받을수 있었다. 다만 이 혜택은 전부 통치자인 [[쿠스코]]의 잉카인에게 해당되는 내용이었으며, 정작 변방이나 국경 지대의 피지배 부족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잉카는 [[아즈텍 제국]]과 비슷하게 지방 영주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통치에는 잘 간섭하지 않았다. 각 지방마다 일정한 양의 공물을 정기적으로 부과했는데 이 양이 너무 막대하고 과중하여 [[반란]]의 불씨를 낳기도 했다. 예를 들면 아마존 지방의 부족에겐 마코앵무새의 꼬리깃을 모아오라는 식으로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공물로 부과했다. 물론 수확물과 모직물 등 다른 형태의 공물도 꾸준히 받았다. 잉카 제국은 또한 마을 주민의 강제 노동을 이용하여 산비탈을 개간하거나 계단식 밭을 일구어 새 경작지를 만들었고, 이 새 경작지는 당연하게 쿠라카나 잉카의 군사 지도자들 혹은 잉카 제국에 공을 세운 귀족에게 돌아갔다. 이 사유지들은 아이유 공동제가 아니라 '''야나코나'''라는 잉카 제국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노예]] 계층에 의해 경작되었다.[* [[스페인인]]에 의해 '영원한 하인'이라고 불린 이들은 아이유 공동체 내에서 차출해서 잉카 지배층에 보내야 했으며 이들은 잉카의 [[사원]]이나 궁궐에서 일하거나 개인적인 봉사를 수행했다.] 또한 복속된 부족은 '''미타'''라는 제도하에서 길을 닦고 관개용 운하나 성채 건설에 무급으로 동원되었으며, [[광산]]에서 일해야 했고, [[병사]]나 귀족에게 입힐 일정량의 옷을 생산하여 바쳐야만 했다. 미타는 [[스페인]] [[식민지]] 시기에도 [[포토시]] 은광 같은 중노동에 동원할 인원을 차출하는 용도로 유지되었다. 이런 통치 방식에서 잉카를 과도하게 찬양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사회주의]]나 복지국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당시 잉카의 각종 사회보장제도들은 피지배 민족이 아닌 잉카 황족, 귀족, 사제, 전사, 관리 등 오직 잉카인들만을 우대하는 방식이었다. 잉카 제국이 한 일은 국가의 땅이나 사원의 땅에서 농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이 창고에 보관된 옷과 곡식은 군대, 황제를 위해 일하는 수공업자, 공공사업을 위해 징모된 노동자, 쿠스코와 그 외 도시에 거주하는 관리들을 입히고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ncasociety01.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5177_329844.jpg|height=300]]}}} || 잉카의 여인들은 보통 16세 정도에 결혼했고, 남성의 경우 20세 정도가 결혼 적령기였다. 신분이 낮은 남자들은 오직 [[일부일처제]]만이 가능했으나 지방의 유력자들처럼 많은 아내들을 모두 먹여살릴 수 있는 경우 [[일부다처제]]도 상관없었다. 때문에 많은 아내를 거느린다는 것은 곧 해당 남성의 능력과 재력, 사회적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하류층 남성들은 오직 하나의 아내와만 평생을 살아야한다는 것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있었다고 하며,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시 조용히 죽인 다음 새로운 아내를 찾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고 한다.[* 잉카에서는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이 금지였고, 그 절차도 굉장히 까다로웠다.] 때문에 잉카에서는 아내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홀아비가 된 남편이 새 아내를 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내를 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잉카 결혼 문화에서 굉장히 독특한 것이 바로 [[동거]] 제도였다. 아직 미혼인 두 남녀가 서로 같이 1년 정도 동거하면서 서로가 마음에 드는지 알아볼 수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면 곧바로 예식을 올렸고, 보통 비슷비슷한 계급의 사람들끼리 혼인했다.[* 다만 하류층 여자들중 미색이 뛰어난 자가 상류층 남자를 만나 바로 신분상승을 하기도 했다. 잉카판 [[신데렐라]]와 유사한 셈.] 한편 의복의 경우, 관료들은 독특한 문양의 화려한 튜닉을 입고 다니며 스스로를 구분했다. 이 문양들을 가지고 관리들의 계급과 하는 일들을 구분할 수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흑백 체크무늬에 분홍색 삼각형으로 장식이 된 튜닉을 입고 다니는 자들은 군대에 종사하는 장교들이었다. 잉카의 복식은 크게 3개로 나뉘었는데, 맨 첫 번째 갈래가 '알라스카'라고 불리는 일상복이었다. 이는 주로 [[라마]]의 털로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더 고급품이었던 두 번째와 세 번째 갈래를 묶어서 '큅스'라고 부르는데, 큅스도 각자 종류가 달라서 남성들이 [[알파카]] 털로 짰던 옷들은 주로 세금으로 사용되었으며 제국 전역에서 활발하게 생산되었다. 그러나 태양신전에 소속된 신녀들이 짠 큅스는 그 차원이 달랐는데, 값비싸고 부드러운 [[비쿠냐]] 가죽으로 직접 만들었으며 주로 황제나 고위급 신관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급품이었다. 의복 외에도 상류층들은 '라우투'라고 하는 머리장식을 하고 다니기도 했고, 황제 아타우알파의 경우에는 과시를 위해서 [[흡혈박쥐]]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당대 잉카에서 가장 중요했던 식물들에는 현재 마약으로 분류되는 [[코카나무]]가 있었다. 진통제 기능과 환각 기능이 있는 코카나무의 잎사귀를 잉카인들은 신이 내려준 작물로 신성시했고, 주로 의료용이나 마취용, 혹은 마약 대용 등 만능통치약처럼 사용했다. 사람들은 코카 잎사귀를 씹어 기력을 보충하거나 [[각성제]]처럼 주로 썼고, 일부 지방에서는 화폐처럼 쓰기도 했다. 잉카인들의 의료 수준은 우리의 예상외로 꽤나 높았는데, [[두개골]]을 열어 머리 안쪽에 찬 '사악한 기운'을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천공 수술도 실시했고, 환자의 생존율도 무려 80%에 달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꿀]]에 재운 [[박쥐]]를 통째로 씹어먹기도 했고, 키나 나무에서 추출해낸 [[퀴닌]] 성분으로 [[해열제]]를 만들어 썼다. 다만 당연히 동시대 유럽이나 아시아 지방에 비해서는 의료 수준이 현저히 떨어졌고, 질병에 걸리면 주로 미신이나 사제들에게 의존하는 등 전반적인 수준은 원시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